<스케쥴, 그리고 야근>

 

올해로 애니메이션 업계에 몸담은지 10년째입니다.
신입 애니메이터로 시작해서 작품 연출까지 했다가 다시 애니메이터로 일하면서 새삼 많은 것을 생각하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오늘은 '스케쥴과 야근'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습니다.  이건 가장 나중에 얘기할까 했는데 매일의 일상에서 가장 절실하게 피부로 느끼는 부분이라 먼저 얘기하고 싶습니다.

 

왜 야근을 하는가.


이런 질문을 받으면 열이면 열 모두 똑같이 한숨을 쉬는 것으로 답을 대신합니다.  질문 자체가 우문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모두의 대답은 똑같습니다.  "스케쥴 때문이죠 뭐..."

대한민국의 애니메이션 회사에 다니는 애니메이터의 대부분이 야근을 합니다.  애니메이션 회사는 야근이 필수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일이 없으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진행중인 프로젝트가 있으면 메인 프러덕션 대부분의 기간을 야근을 합니다.


단기적인 프로젝트라면 야근하는 것이 크게 문제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야근이라는 것이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야근이 오래 지속되면 체력이 고갈되어 나중에는 일과시간에 하는 일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밤에 한 두 시간 더 작업하겠다고 하다가 낮 시간을 망치게 되는 악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주어진 작업량을 주어진 스케쥴에 적절히 배분해서 업무시간에 집중해서 작업하면 데드라인을 넘기지 않고 마쳐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스케쥴이 밀립니다.
스케쥴이 지연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요.  작업자가 게을러서 늦어지는 경우도 있고 팀과 팀간에 데이터를 주고 받는 과정에서 지연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의외로 말도 안되는 스케쥴 때문에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작업자가 게을러서 늦어지는 경우는 거의 겪어보지 못했습니다.  죽어라고 해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스케쥴이라는 것도 처음부터 이미 오류를 안고 만들어집니다.
앞으로 작업할 것이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한가를 정확하게 계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별 수 없이 과거의 경험으로 대략적인 기준을 만들어서 스케쥴을 만들지만 그 역시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참고만 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작품의 전체 스케쥴이라는 것이 대개가 전체 제작기간은 이미 정해진 상태에서 그것을 크게 쪼개고 쪼개서 각 파트별 스케쥴이 만들어지기 때문이지요.


그 모든 것은 제작비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주어진 제작비로 운영할 수 있는 제작기간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는 확실하네요.  스케쥴을 늘릴 수는 없다는 것.

스케쥴의 데드라인은 정해져 있고, 한 사람이 하루에 할 수 있는 작업량 역시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스케쥴을 지키기 위해서 결과물의 퀄리티를 낮추는 방법이 있겠고, 퀄리티를 낮출 수 없다면 별 수 없이 작업자가 초과근무를 해야 합니다.  단순한 수학이지요.  우리는 대부분 후자를 선택합니다.  왜냐하면 작품의 퀄리티를 낮춘다는 것은 정말 있어서는 안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안 만드니만 못한 작품을 만드는 것은 바보짓이니까요.
그렇다면 작업자들이 초과근무를 하는 방법 이외에는 다른 수가 없는 것 같네요.
정말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겠습니다.


우선 한정된 제작비와 제작기간이 있습니다.  작업자가 하루에 해낼 수 있는 작업량도 한정되어 있습니다.  작업량은 작업의 난이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루에 2초를 해낼 수도 있고 10초를 해낼 수도 있습니다.  
앞서 말했지만 애니메이션 퀄리티의 기준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퀄리티를 낮춘다는 것도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무조건 반감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허접한 결과물을 만들자는 것이 아닙니다.  작품 전체에서의 일관성이 중요한 것이지 무조건 픽사 수준의 애니메이션을 목표로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작업량에 대해서도 얘기 해볼까요.
전체 스케쥴에서 애니메이션 파트가 하루에 30초를 쳐내야 한다면, 하루에 3초를 쳐낼 수 있는 작업자 10명을 고용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지만 제작비 여건상 5명 밖에 고용할 수 없다면 그 5명이 쳐내야 하는 분량은 1인당 6초로 늘어납니다.  하루에 3초를 해내는 사람이 6초 분량을 쳐내야 한다면 그 애니메이션 결과물은 어떨까요.  안 봐도 DVD지요.  

스케쥴이 우선이라고 이를 악물고 6초의 작업을 해내지만 컨펌이 나지 않습니다.  데드라인은 다가오고 계속되는 수정 때문에 야근을 합니다.  주말에도 나와 작업합니다.  체력은 바닥나고 집중력도 떨어져서 실수도 생깁니다.  그래도 마감일은 지킵니다.  작품 전체 스케쥴에 영향을 주면 안되기 때문이지요.
단기적인 프로젝트가 아니라 TV시리즈나 장편을 만드는 경우에 그런식으로 한 달, 두 달 계속되면 몸이 지치는 것은 물론이요 마음까지 지치게 됩니다.  심한 경우 조금씩 애니메이션 업계에 대해 회의를 느낍니다.  그 즈음 되면 이직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비극이지요.  하지만 이게 현실입니다.

 

제작 파이프라인상의 시스템 문제로 인해 스케쥴이 지연되는 것이라면 그 문제의 해결 또한 시스템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시스템의 오류를 사람이 고스란히 받아서 몸으로 떼우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시스템의 오류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사람들 사이에서의 작은 문제들이 모여 불거지는 것이라 사람의 문제라고 할 수도 있지만 누구의 잘못이라고 꼬집어서 그 책임을 묻기 힘든 경우가 더 많습니다.

지연되는 스케쥴 때문에 제작비가 늘어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건 원래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작품의 제작비를 애초에 너무 작게 잡은 탓이지요.  100원을 가지고 1000원짜리를 만들어내려고 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 것입니다.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열정이 있기 때문에 힘들어도 견뎌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열정을 볼모로 작업자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회사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실력있고 열정있는 사람들이 애니메이션 업계를 떠나는 모습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꼭 야근을 해야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무조건 몸으로 떼울 것이 아니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방법을 찾으면 됩니다.  찾으면 방법은 있습니다.


커다란 시스템 속에서 말단 애니메이터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당장 바꾸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지금은 말단 직원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중간 관리자가 되고 또 누군가는 회사를 차려서 사장이 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때가 오면 조금씩이라도 변화를 주자는 것입니다.  똑같은 악순환을 되풀이하지는 말자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늙어서 할아버지가 되어도 애니메이션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있고 그 생각을 버린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견디는 것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실사영화에 버금가게 크게 성공한 애니메이션 작품이 나오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 어디에서인가 그 작품이 태동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누군가가 아주 멋진 작품을 만들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지금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일 수도 있고 또는 저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달콤한 열매를 얻기 위해 오늘도 씨디쓴 고통을 견디는 동료 여러분, 우리 힘 냅시다!

 

2009.7.24

Posted by 김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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