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디즈니의 애니메이터 글렌 캐인(Glen Keane)의 단편 애니메이션 "듀엣(Duet)"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물 흐르듯 부드러운 연필선과 가슴 찡한 스토리, 보는 이로 하여금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감동적인 이 작품은 이미 2015년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 부분 후보에 이름을 올렸고 많은 사람들이 수상을 점찍고 있다.
글렌 케인은 디즈니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전설적인 "9 Old Men"의 터치를 그대로 물려 받고 40년 가까이 디즈니에 몸 담고 있으면서 인어공주의 에이리얼부터 최근의 라푼젤까지 많은 메인 케릭터를 그려낸 주인공이다. 2012년 3월에 디즈니를 떠나 지금은 개인 작품 활동을 하고 있고 "듀엣"은 그의 첫 번째 감독 데뷔작이다.
하지만 우리가 본 "듀엣"은 진정한 완성작이 아니다. 무슨 소리일까? 그럼 미완성이란 말인가?
무슨 소리인지 지금부터 찬찬히 설명을 해 보겠다.
"듀엣"이 처음 공개된 곳은 극장도 아니고 유튜브도 아니고 구글의 개발자 컨퍼런스였다. 2014년 6월 2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Google I/O 컨퍼런스에서는 세 가지 프로젝트의 발표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스포트라이트 스토리(Spotlight Stories)라는 프로젝트를 소개하며 글렌 케인이 무대에 등장한다. 작품 제작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주인공 캐릭터를 실시간으로 그려 보여주는 깜짝쇼도 선보였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듀엣"의 최초 상영이 이루어졌는데 다만 이 영상은 일반 감상용이며 Non-Interactive 버전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다른 버전이 있다는 뜻인가? 왜 이런 자리에서 작품을 공개한 것일까?
그리고, "듀엣"이 최초로 공개된 날로부터 6개월 뒤인 2014년 11월 18일. 모토롤라와 구글은 "듀엣"의 인터렉티브 버전을 드디어 공개했다. 진정한 완성본이 세상에 선보인 것이다.
인터렉티브 버전의 "듀엣"을 보기 위해서는 모바일 앱 "Google Spotlight Stories"를 실행시켜야 하는데 그 안에는 두 가지 작품이 더 들어 있다. "바람부는 날(Windy Day)", "벌레들의 밤(Buggy Night)"이 그것이다. "듀엣"은 모바일 전용 인터렉티브 애니메이션으로 기획된 세 번째 작품인 것이다.
단순히 디즈니 출신 장인의 단편 애니메이션인 줄 알았는데 구글에 모토롤라까지 등장하다니, 이 작품의 탄생 비화가 궁금하다!
ATAP
구글에는 ATAP("에이탭"이라고 발음)이라는 소규모 그룹이 있다. The Advanced Technologies and Products의 약자인 ATAP은 현존하는 기술들을 활용해서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벤처 그룹 집단인데 이들은 단순히 연구만 하는 게 아니라 실생활에서 사용 가능한 제품들을 단시간 내에 만들어 낸다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까지 공개된 프로젝트는 3가지 인데 지난 6월 26일에 있었던 개발자 컨퍼런스가 중간 발표 프리젠테이션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데모를 보면서 SF 영화에서나 보던 상상의 기술이 지금 내 손에 있는 스마트폰 만으로도 가능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히 말하면 ATAP 그룹은 응용력의 천재들이 모인 곳이고 그 중에서 모바일용 인터렉티브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스포트라이트 스토리인 것이다.
인터렉티브 애니메이션
우리가 영상을 감상할 때, 모니터나 타블렛 또는 모바일 기기는 영상을 투영하는 스크린의 역할에 그친다. 스포트라이트 스토리 프로젝트는 스마트폰에 내장된 다양한 기능을 활용해서 모바일의 화면을 단순한 스크린이 아닌 그 너머의 세상을 비추는 창문의 역할을 하도록 해서 감상자(유저)가 이야기 속 세상을 적극적으로 체험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 첫 번째 단계로 시도한 것이 감상자의 손에 영상의 카메라를 쥐어주는 것이다. 영상을 제작하는 사람이 이미 만들어 놓은 화면을 일방적으로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부분을 비추어 볼 수 있게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주인공 캐릭터가 아니라 지나가는 엑스트라 캐릭터를 따라 카메라를 이동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정말 그게 가능할까?
워크래프트(World of Warcraft), 테라(TERA) 등으로 대표되는 MMORPG 게임에서는 이야기가 비선형적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사용자가 원하는 장소로 이동해 가면서 역할을 수행해 나아갈 수 있다. 캐릭터의 움직임 뿐만 아니라 화면 앵글의 구성 또한 자유롭다. 하지만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있는 (선형적인)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는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따라 감상자를 이끌어가야 하기 때문에 영상의 제작 단계에서 이미 화면의 프래이밍이 결정된다. 영화로 치면 카메라 감독의 손에서 이미 화면은 결정 나는 것인데, 바로 이 카메라 감독의 역할을 감상자에게 넘겨주고자 하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표다.
Windy Day
재능 있는 엔지니어들과 아티스트들이 모여 첫 번째 작품을 시작했다. 기술력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라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최고의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 위해 픽사의 실력자들이 선택되었다. 감독으로는 "제리의 게임(Geri's Game)"으로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 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는 얀 핑카바(Jan Pinkava)를 비롯하여 "몬스터 주식회사(Monster's Inc)"의 프로듀서와 픽사의 현직 애니메이터들이 모였다.
그들의 가장 큰 고민은 사용자들이 메인 캐릭터를 화면에서 놓치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사용자들에게 카메라의 자유를 주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주인공이 장소를 이동하기 때문에 화면(스마트폰)을 고정시켜 놓으면 주인공이 프래임 밖으로 사라지기도 한다는 말이다. 사용자 경험도 중요하지만 이야기를 놓치지 않도록 하는 것또한 제작자들의 고민이었다. 하지만 제대로만 만든다면 사용자가 작품의 감독이 되는 멋진 경험을 선사하게 될 것이었다.
결국, 애니메이션 작품은 하나지만 제작자가 내놓은 감상용(Non-Interactive) 버전과 사용자들이 마음대로 화면을 구성할 수 있는 다양한 인터렉티브 버전이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Duet
글렌 케인이 듀엣을 제작하는 과정은 더욱 까다로웠다. 우선 직접 손으로 그린 연필선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고민을 해야 했다. 10,055 장의 그림를 모두 스캔해서 디지털 이미지로 만드는 과정에서도 이미지의 손실을 최소화 하기 위해 새로운 압축 알고리듬을 만들었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영상이기 때문에 그 가상의 공간을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도 고민이었고 무엇보다 주인공 캐릭터의 성장 과정을 쫓아 가는 과정에서 사용자들이 캐릭터를 화면 밖으로 놓치는 일이 없도록 세심한 연출이 필요했다.
백문이 불여일견. 메이킹 영상을 소개한다.
사용자들은 영상에 등장하는 남,녀 주인공을 원하는 대로 선택해서 따라갈 수 있다. 누구를 따라 가든 계속해서 서로 만났다가 헤어지기를 반복하면서 결국에는 하나로 합쳐지게 된다. 다시 말해서 보는 사람마다 각자의 편집판이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며 일반에게 공개 된 영상은 말하자면 감독인 글렌 케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감독판 쯤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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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업계에 몸 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항상 비슷한 고민들을 털어놓는다.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갈망, 제작비에 대한 고민, 인력 확충의 어려움, 변화하는 세상에 맞는 새로운 방향 등 등.
"듀엣"의 제작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그런 고민들을 우리만 하고 있는 게 아니구나 하고 깨달았다. 모바일용 애니메이션이란 말 역시 오래 전부터 자주 거론되던 이야기 중 하나다. 인터렉티브 애니메이션이란 말도 마찬가지다. 내가 못 봐서 그렇지 내 주위에서 누군가는 이것 보다 훨씬 앞서가는 무언가를 만들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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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구글 스포트라이트 스토리 Google Spotlight Stories
* 애니메이션 매거진 http://goo.gl/8NQQRF
* 구글 I/O 컨퍼런스 http://youtu.be/kxG2yTAxQ8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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