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다니던 회사와의 계약이 끝나고 프리의 몸이 되었다.

이제 또 어디로 가야하나 고민을 하기도 전에 내가 모르는 어떤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같이 일해 볼 생각이 없냐며 좋은 조건을 제시한다.  나로서는 기쁘고 고마운 일이다.
회사는 아담하고 분위기도 좋고 생각도 잘 맞았다.
하지만, 고민끝에 정중히 거절했다.
 
왜 그랬을까?
배가 고파 봐야 정신을 차린다는 말도 있지만, 핑계 없는 무덤이 없듯 나름의 이유가 있다.
 
지난번 다녔던 회사에서는 애니메이터 평직원으로 일했었다.  바로 그전 회사에서는 감독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었으니 조금 과장하자면 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에 비할 만했다.  그 때는 나름의 기준이 있었고 그 기준에 맞춰서 선택한 길이었기 때문에 후회는 없었다.  그 때의 기준은 "집에서 가까운 회사"가 일순위였다.
운 좋게 집에서 가까운 회사와 연이 닿았고, 당연히 급여 수준은 많이 차이가 났지만 입사를 했다.
말단 작업자로 일하자니 몸이 힘들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창작의 고통은 덜했지만 하루종일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일만 해야했기에 육체적으로 힘들었다.
그래서 회사를 옮기게 되면 프리프러덕션 쪽으로 일을 하리라 생각했다.  오랫동안 해오던 일이고, 또 그쪽이 더 나에겐 맞았다.  하고 싶다고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최대한 그렇게 선택하리라 마음 먹었다.
 
좋은 조건을 제시했던 회사에서는 애니메이션 수퍼바이져를 원했다.  작업도 같이 해야하는 자리다.
이미 육체적으로 많이 지친 상태라 계속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죽어라고 하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기대에 못미치는 사람이 되기는 싫었다.
 
오래전에 다니던 또 다른 회사가 있는데, 그곳에 가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맡아서 할 수 있었다.  고맙게도 나에게는 항상 문을 열어놓고 있는 회사다.  나 역시 애니메이션의 시작을 그곳에서 했고 온 열정을 다해서 일했던 곳이라 애증이 깊다(애정이 아니라 애증임).  하지만 쉽게 결정을 하기 힘든 이유는 집과 회사의 거리상의 이유와 함께 급여의 수준이 기대에 못미치는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그곳을 선택했다.
 
이 세상의 모든 직장인들이 마찬가지겠지만, 회사를 선택함에 있어서 "자아실현"과 "경제적인 이유" 사이에서 끝없이 갈등을 한다.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선택이 달라지지만 자기가 처한 상황에 따라서도 달라지기도 한다.  오히려 후자의 경우가 더 많다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지금 한 아이의 아버지 입장이라면 당연히 금전적인 선택을 따랐을 것이다.  그건 분명하다.
빚에 허덕이고 있었다면 역시 돈을 선택했을 것이다(그렇다고 빚이 없다는 건 아니다, 요즘 세상에 빚 안지고 사는 가정이 있을까?).

오늘날 직업 전선에 몸바치고 있는 수 많은 아버지들, 어머니들.
그들중에 자신의 직업에 만족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아실현을 함께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마 대부분은 한 집안의 경제적인 부담을 어깨에 짊어지고 밥벌이의 수단으로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리 아버지들이라고 꿈이 없었을까.  그들도 나와 똑같은 청춘 시절을 겪으며 나름대로의 꿈을 꾸었을 것이다.  어린 내 눈에 하찮게 보였던 아버지의 직업들은 나 때문에 선택한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렇다.  자신의 꿈을 접고 가정의 평안을 위해 선택하셨을 그 길.  지금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에게서도 같은 모습을 나는 본다.
 
청춘시절 내 모습을 돌이켜 보건데, 자식들을 위해 꿈을 포기하는 부모들이 위대하기 보다는 어리석게 보였다.  자식들의 입장에서 자기를 위해 부모님이 꿈을 접으셨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부담스러울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게 다 철이 없어서 했던 생각들이다.  이제 나이가 들어 부모 세대가 되어보니 우리 부모님들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겠다.
 
이번 내 선택은 아마도 내가 철이 덜 들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면 됐다" 라는 말도 있잖은가.
꿈을 접고 사는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 해줄 수 있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 내 소명이다.  그래서 내가 만드는 작품을 보고, 단 한 시간이라도 현실의 짐을 내려놓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날아보게끔 환상을 제공해 줄 수 있다면, 알면서 선택한 이 바보 같은 길에서 나는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김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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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에 항상 탄산음료가 하나 정도는 있는데, 주로 칠성사이다를 마신다.
색소가 안 들어가 있어서 사이다를 마시는데, 탄산음료가 건강에는 좋지 않다고 해도 가끔 땡길 때가 있으니까.

그런데, 얼마전부터 이놈의 사이다 뚜껑을 따기가 힘들어졌다.  힘을 주어 돌려도 손 안에서 헛돌기 일쑤다.  나중에는 짜증까지 난다.

살펴봤더니, 손에 잘 안 잡히는 이유가 있었다.
뚜껑의 높이가 좀 낮아졌다.

 

콜라 뚜껑과의 비교, 뚜껑이 원래는 비슷한 크기였다.
B와 C의  높이가 다르다.

 

왜 이렇게 바뀌었는지 속사정을 나는 알 수가 없다.
용기의 형태가 바뀌는 일이기 때문에 생산라인의 변화가 필요했을 것이다.  비용이 드는 일인데 왜 했을까?
추측만 할 수 있는 내 입장에서는, 기업이란 수익 창출이 목적이기 때문에 결국 비용 절감을 위해 그렇게 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생산라인을 바꾸는 비용이 들긴 하지만 차후에 지속적으로는 원가 절감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했으리라고 추측한 것이다.  소비자의 편의를 위해서라면 이렇게 불편하게 바뀌지는 않았을터이므로...

 

이것이 기업에게 도움이 될지 안될지 난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적어도 나는), 칠성사이다를 선택하는데 예전과는 달리 조금은 주저할 것이다.  굳이 이 녀석이 아니더라도 탄산음료의 종류는 넘친다.  탄산음료 진열대 앞에 섰을 때, 칠성사이다의 뚜껑을 따다가 짜증이 났던 기억이 떠오를 것이고, 그 짜증을 감수하면서까지 굳이 칠성사이다를 마셔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을 것이고, 그러면 선택은 다른 제품이 될 것이다.

 

나와 같은 소비자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 결국 기업에는 마이너스가 될 것이다.  한 번 돌아선 소비자의 마음을 다시 되돌리기는 쉽지 않다.  뚜껑의 높이가 달라졌다는 이유 때문에 기업이 망하지는 않겠지만, 하여튼 나중에 나중에 이 뚜껑이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자못 궁금하다.

Posted by 김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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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무리의 사람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을 건너고 있다.

 

지치고 목이 마른다.

하지만 그들을 이끄는 사람은 계속 갈 것을 재촉한다.  사막 끝에 도달하면 오아시스를 주겠다고 하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 순간의 물 한 모금이다.  나중에 오아시스가 아니라...

 

장편이든 TV시리즈든 짧게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수 년이 걸린다.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지치지 않고 오래 가는 것이 중요하다.  지치지 않으려면 무리해서는 안된다.  필요할 때 쉬어 가면서 일을 해야 끝까지 갈 수가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애니메이션 회사들은 장거리를 마치 단거리처럼 헐떡거리며 뛰어 간다.  사람들이 지쳐 나가 떨어져도 계속 달린다.  쉬지 않고 달린다.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겠지만 기왕이면 즐겁게 달렸으면 좋겠다.

 

오아시스까지 사람들을 끌고 도착했다고 해도 그들은 그 오아시스의 물을 다 마실 수는 없다.  기껏 해야 몇 모금이 전부다.  게다가 그들은 지치고 병들었다.  수많은 낙오자도 생겼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손해는, 그 사람들이 다시는 그 지도자를 따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또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한다.  사막을 건너는 노하우를 가진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진 채로...

Posted by 김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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