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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9.03 몽타주 시퀀스(Montage Sequence) 16
  2. 2010.08.26 12명의 성난 사람들(12 Angry Men) 2
  3. 2010.08.20 비쥬얼 스토리텔링(Visual Storytelling)의 예(2) 2
 
 

픽사의 애니메이션 <Up>이 세상에 선보였을 때, 모든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영화 초반부의 몽타주 시퀀스의 감동을 이야기 했다.  대사도 나레이션도 없이 잔잔한 음악을 따라 약 4분 정도의 영상이 흐르고, 잠시 Fade Out이 되었을 때, 관객들은 가슴이 먹먹하고 코끝이 찡한 감동을 맛보았다.  영화 평론가들도 그 장면을 두고, 찰리 채플린의 영화에 버금가는 훌륭한 몽타주 시퀀스라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도대체 "몽타주 시퀀스"라는 말이 뭘까?
범죄자의 인상착의를 목격자의 진술을 토대로 그린 그림을 몽타주라고 하는 말은 많이 들었는데, 몽타주 시퀀스는 또 뭔가?
 
몽타주(Montage)라는 말은, 프랑스어 "Monter"에서 유래한 말인데 "모으다, 조합하다" 라는 뜻이다.  이것이 사진이나 영화에서는 이미지나 컷을 짜집기 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영화 이론을 공부하다 보면 "몽타주 이론"이라는 대목을 접하게 된다.  영화를 체계적으로, 특히 연출에 대해서 공부하기 위해서는 꼭 알아야 하는 중요하고도 중요한 내용인데 아쉽게도 애니메이션만 공부하면 접하기 힘든 이론이다.  역사가 매우 오래 깊은 이론이지만 영상 언어를 활용하는 과정에서는 아직도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 이론이다.  결코 죽은 이론이 아니라는 뜻이다.
 
◆ 몽타주 이론
몽타주 이론은 1920년대에 구소련의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Sergei Eigenstein)"에 의해서 주창되고 발전된 이론인데, 영화의 컷들을 단순히 시간 순서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컷들을 조각내고 재조립함으로서 새로운 의미를 담아낼 수 있다는 이론이다.  쉽게 풀어서 쓰자면, 평범한 컷들이라도 앞 뒤에 어떤 컷들을 조합해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전혀 새로운 느낌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에이젠슈타인의 대표작 <전함 포템킨>(1925)
초기 몽타주 기법의 대명사인 '오뎃사 계단의 학살'장면
 
갑자기 웬 영화 이론?
골치 아픈 이론은 잠시 접어두고,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간단한 예를 들어보도록 하자.
 
다음 4 개의 이미지를 보면, 캐릭터의 클로즈업 앞쪽에 각각 다른 장면을 붙였다.  캐릭터의 표정은 4 컷이 모두 똑같은 것이다.  하지만 앞에 어떤 장면이 있었느냐에 따라 캐릭터의 감정이 다르게 느껴진다.
 
"오~ 정말 아름다운 풍경이야!"
"살다보니 별 우스운 광경을 다 보는군"
"위험해! 조금만 버텨!"
"이런... 큰일 났군"
 
아주 단순하고 기초적인 예를 들었기 때문에 약간 억지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정지된 이미지가 아닌 일련의 영상으로 조합된 것으로 보게 된다면, 4 컷의 캐릭터 감정이 틀림없이 각각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이렇게 컷과 컷이 충돌하면서 새로운 의미가 생긴다는 것이 초기 몽타주 이론의 기초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컷들을 재조합하고 충돌시켜 인위적으로 의미를 만든다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그 이후에 몽타주 이론은 논쟁 속에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고, 많은 파생 이론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굳이 이론을 들먹이면서까지 설명하지 않아도 위와 같은 식으로 편집을 하면 의미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한 결과가 아니냐, 그게 편집의 묘미가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타고난 감각이 있는 것이다.  몽타주 이론은 편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알고 있는 것과 창작 작업에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하여튼, 똑같은 장면이라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관객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니, 정말 흥분되지 않는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몽타주 이론은 현대에 와서는 그 의미가 퇴색된 부분도 있고 더 복잡하게 발전된 부분도 있다.  그중 하나의 예가 바로 <Up>의 몽타주 시퀀스처럼 발전한 경우인데, 평범한 컷들을 충돌시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기존의 방법과는 완전히 다르다.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하나의 장면에 함축적으로 담아내기 위해 인위적으로 화면을 구성하고, 그런 장면들을 차례대로 나열해 보여줌으로서 기존의 일반적인 편집 기법으로는 느낄 수 없는 전혀 새로운 감정을 전달하는 기법이다.
주로 긴 시간 동안 일어나는 일들을 짧은 시간에 보여주고자 할 때 사용하는데, 하나의 사건이 연속적으로 전개되는 일반적인 편집의 흐름으로는 결코 담아낼 수 없는 시(詩)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잘 사용하면 그 효과는 놀랍다.  밀도가 높은 화면들이 마치 그림책처럼 천천히 흘러가는 동안에 관객은 영화 속 시간의 하루, 또는 일주일, 또는 일 년, 또는 <Up>의 경우처럼 주인공의 청년기부터 노년기에 이르는 50년 이상의 시간을 단 몇 분의 시간 사이에 고스란히 체험하게 된다.
 
한 장면 안에 수십 년의 시간의 흐름을 함축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능력.  그야말로 최고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제한된 컷 안에 수십 년을 담아낸답시고 하나의 컷에 너무 많은 내용을 구겨 넣으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서 관객은 아무 것도 읽을 수 없다.  하나의 장면에 하나의 이야기만 담되 그 한 장면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몽타주 시퀀스의 비밀이 되겠다.
 
그렇다면, 과연 <Up>은 어떤 구성으로 50년의 시간을 단 4분 안에 담았을까?
 
"주인공 칼(Carl)은 어린 시절 소꿉친구 엘리(Ellie)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한다.  탐험가 기질이 있는 두 사람은 언젠가는 남미의 파라다이스 폭포로 모험을 떠나는 것이 꿈이다.  비록 가난한 시작이었지만 신혼은 꿈처럼 달콤했고 두 사람은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각박한 현실은 꿈에서 점점 멀어지게 만든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두 사람은 노인이 되었고 그러던 어느 날, 잊고 있었던 꿈을 새삼 떠올린다.  뒤늦게나마 꿈을 이루어보려고 어려운 결심을 하지만 불행히도 칼은 배우자인 엘리를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고 홀로 남는다".
 
그야말로 인생의 희로애락이 다 담겨 있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를 한 시간도 아니고 10분도 아니고 4분 안에 어떻게 담아낼 수 있었을까?  모두가 공감하겠지만 그 결과물은 한 장면 한 장면이 그야말로 예술의 경지다.
가장 일상적인 장면들로 구성해서 관객이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면서 그 장면이 담고 있는 의미를 너무나도 명확하게 이해시키고 있다.  그렇게 관객은 주인공 칼과 함께 인생의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경험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제부터 진짜 영화가 시작될텐데 마치 긴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은 나른한 피로감까지 느껴지면서, 남은 시간이 부담스럽기까지 할 지경이다.
 
장면들을 어떻게 구성했는지, 대표적인 몇 개의 장면들을 살펴보자.
 
1. 신혼(희망찬 시작)
비록 빈손으로 시작하는 신혼이지만 희망이 넘치는 분위기를 전해 주고 있다.  칼과 엘리는 결혼식 예복을 그대로 입고 있다.  실제로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어차피 이미지 샷이다.  두 사람 모두 어서 빨리 행복한 나의 집을 만들고 싶어서 잠시도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그 마음이 느껴진다.  낡은 집이지만 두 사람 모두 표정이 밝고, 창밖으로 환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어서 밝은 앞날을 예견해주는 것 같다.  특히 엘리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로 톱질을 하는 모습이 그녀의 적극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성격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2. 직업(몽상가의 기질)
두 사람이 모두 꿈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한 직업을 갖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어릴 적부터 동물 관찰을 좋아하는 엘리는 동물원에서 일을 하고, 칼은 마치 꿈을 파는 풍선장수 같다.  "South America"라고 쓰인 벽의 글씨가 그들이 향하고자 하는 목적지를 대변해 준다.  둘 다 돈벌이가 시원치 않을 것이라는 건 뻔 하지만, 서로 가까이 있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어느 정도 몽상가 기질이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칼의 풍선은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를 담고 있다.
 
3. 좌절
아기를 낳아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자 하는 두 사람의 마음을 아기방을 꾸미는 장면으로 구성하였다.  벽에 그린 그림은 영화 본편에 앞서 보았던 "Partly Cloudy"를 살짝 차용하는 센스.  특히 칼이 만들고 있는 아기용 모빌은 하늘을 날고자 하는 칼의 내면세계를, 벽의 그림을 통해서는 동물을 좋아하는 엘리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일이 뜻한 대로만 풀리지 않는 법.  산부인과로 보이는 진료실에서 흐느끼는 엘리를 통해 그녀가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바로 앞 샷의 화려함과 대비해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로 두 사람의 마음을 고스란히 전달해 주고 있다.
 
4. 새로운 희망
 어떤 고난도 파라다이스 폭포를 향한 두 사람의 꿈을 꺾을 수 없다.  벽난로 위의 장식을 통해서 두 사람이 서로의 꿈을 존중하고 있으며, 그 꿈이 얼마나 그들에게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두 사람의 꿈은 '파라다이스 폭포'라고 써 붙인 저금통으로 현실화 되어가기 시작한다.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결코 꿈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느끼게 해준다.
 
5. 현실의 벽
살다 보면 예기치 않은 일들이 계속 생기기 마련이다.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서 삶이 생각처럼 녹녹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뜻하지 않은 지출이 생겨서 저금통을 깨는 상황을 통해서 현실을 헤쳐 나아가기 위해서는 잠시 꿈을 접어야 하는 일이 생긴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6. 계속되는 일상
넥타이의 변천사(?)를 통해서 세월의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야말로 최고의 센스!  굳이 커다란 스케일로 세월의 변화를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인생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까지 느낄 수 있다.
 
7. 노년
인생의 황혼.  젊은 사람들 못지않은 낭만적인 분위기를 통해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고 있음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노을빛 조명, 조금 밖에 남지 않은 촛불을 통해서 그들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다.
 
8. 잊었던 꿈
어느 날 문득, 잊고 있었던 젊은 시절의 꿈을 되새기는 장면.  집안 청소를 하는 상황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주고 있다.  엘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칼의 표정은 미안함과 고마움의 복잡한 감정이 느껴진다.  "나를 만나 고생만 하고 이렇게 늙어 버렸구나" 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9.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엘리와 함께 늦게나마 꿈을 이루어 보려는 소망을, 남미로 가는 항공권을 구입해서 소풍 바구니에 담아 엘리에게 깜짝 선물을 준비하는 모습으로 담아냈다.  특히 저녁노을 가득한 언덕 장면은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앞서서 젊은 날의 장면에서 똑 같은 장소가 나오는데, 그 때는 엘리가 먼저 언덕에 올라가서 칼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엘리가 기력이 없어서 뒤쳐졌다.  엘리의 뒤쪽으로 해가 막 지기 시작하는 장면이 마치 꺼져가는 엘리의 생명처럼 느껴진다.  엘리가 힘 없이 주저앉자 칼이 당황해서 뛰어 내려가고, 이때 모자가 벗겨지는데 그 순간 뭔가 일이 잘 못 되었다는 느낌이 가슴을 때린다.  작은 디테일에 많은 얘기를 담는 멋진 장면이다.
 
10. 이별
 
11. 홀로 남은 칼
이 시퀀스의 마지막 장면은 그야말로 가슴 한 구석이 뻥 뚫리는 것 같은 허전함이 느껴진다.  결혼식을 했던 그 교회의 같은 장소.  환호성도, 축하도 없이 텅 빈 교회에 홀로 앉아 있는 칼.  바로 앞의 병실 장면에서 바로 이 장면이 나오면서 혹시 엘리가 회복되지 않았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느낌이다.  어두운 교회의 분위기가 마치 장례식을 막 마친 분위기를 느끼게 해 준다.
 
 
대표적인 몇 개의 장면들만 봐도 얼마나 세심하게 다듬어지고 연출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시각적인 기억을 관객의 머릿속에 남기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의 감정을 관객의 가슴속에 남기도록 구성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모든 장면들이 최소 100 :1의 경쟁률을 뚫고 선택된 것들이라고 단언 할 수 있다.
하고 싶은 말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되 억지스럽거나 과도하지 않게,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편안한 장면들을 통해서 전달하는 섬세함.  정말 멋지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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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애니메이션을 공부하다 보면 어느 순간 벽에 부딪히는 경험을 한다.  특히 연출에 대한 욕심이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데, 공부를 하고 싶어도 어디서 어떤 것을 보고 배워야 할지 막막해 하는 경우가 많다.  인터넷에 정보가 널려있다고 하지만 어떤 것이 정말 필요한 자료인지 가려내기도 힘들다.  그럴 땐 영화 쪽으로 시선을 돌리라고 권해드리고 싶다.  당장 서점에만 가도 영화와 관련된 이론 서적은 넘친다.  어차피 영화나 애니메이션이나 영상으로 이야기를 전달하기는 마찬가지다.  표현 도구가 다를 뿐이다.
 
물고기를 잡아다 주지 말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라는 격언이 있다.
애니메이션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좋은 애니메이션을 보여주는 것이 물고기를 잡아다 주는 것이라면, 애니메이션의 기초와 툴을 가르치는 것은 낚시질과 그물질로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것에 해당한다.  하지만 남이 만들어 놓은 낚싯대와 그물로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조금 시선을 돌려서 영화 이론부터 체계적으로 공부를 한다면 자신에게 맞는 나만의 낚싯대와 그물을 만드는 법을 배우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몽타주에 대해 얘기하다 보니 새삼 드는 생각이었다.
 
*몽타주 시퀀스에 관한 또 다른 글 : http://bellstone.tistory.com/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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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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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명의 성난 사람들(1957)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와 함께 법정 영화의 백미로 꼽히는 이 영화는, 관객을 또 한 명의 배심원으로 그 자리에 함께하는 것 같은 긴장감을 느끼게 해준다.  또한 IMDB(The Internet Movie Database)에서 역대 영화 Top10 을 줄곧 고수하고 있는 사실이 영화의 작품성과 인기를 증명하고 있다.

영화는 오프닝과 엔딩을 제외한 나머지 러닝타임 내내 하나의 방 안에서 떠나지 않는다.  선풍기조차 돌아가지 않는 푹푹 찌는 열기와, 12명 배심원들의 치열한 토론이 이루어지는 작은 방은 그야말로 용광로 같다.

이 영화를 보며 정말 놀란 것은, 90분 내내 쉼표 없이 이어지는 12명의 심리를 잡아내는 카메라다.  제한된 공간에서 컷을 이어가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데, 그것도 12명이라는 많은 인물의 대화를 90분 내내 매끄럽게 이어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에 가깝다.  어떤 방식으로든 컷을 구성해 본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12명 전체를 잡아내는 와이드샷부터 단독 클로즈업 샷까지를 아우르면서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물 흐르듯 컷을 이어간다.

법정을 소개하는 짧은 오프닝 직후에 영화의 타이틀 크레딧과 함께 본격적인 내용이 시작되는데, 배심원실로 들어서는 그 첫 장면부터 나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문이 열리면서부터 자그마치 6분 10초에 이르는 롱테이크로 담아낸 배심원실의 첫 장면은, 그 후로 이어질 끝없는 토론의 홍수를 예견함과 동시에 관객을 또 한 명의 배심원으로서 그 방에 초대하는 멋진 장면이다.

이런 장면을 여러개의 컷으로 나누지 않고 하나의 롱테이크로 가게 되면 어떤 한 인물에만 집중하든지 아니면 전체를 아우르든지 둘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좁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12명의 배심원들을 골고루 다 잡아내고 있다.  카메라가 들어가고 나오는 움직임에 따라서 인물들이 프래임에 들어오고 빠져나가는 과정을 보면 마치 아름다운 안무를 보는 것 같다.  보고 있으면 황홀할 지경이다.

12명의 배심원들은 피고가 유죄나 무죄냐를 만장일치의 평결로서 합의를 이루어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지는데, 11명이 유죄라고 주장하는 와중에 공교롭게도 단 한 명이 무죄를 주장하고 나선다.


얼른 평결을 내리고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나머지 사람들은, 왜 무죄라고 생각하느냐를 들어보기 보다는 왜 유죄인지 설득하는 것이 빠르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각자 자기의 주장을 펼쳐 놓는다.  하지만 모두들 예상하셨겠지만, 11:1의 일방적인 싸움은 그리 쉽게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12명이 만장일치의 평결을 이루기 전까지는 아무도 이 방에서 나갈 수도 없다.

하나의 장소에서 90분을 꽉 채우는 이야기.  잠시의 쉼표도 없이 실제의 시간과 동일하게 흘러가는 영화속의 시간.  지루할 것이라는 선입견은 버리시길...
어쨌든 영화는 마지막에는 12명 만장일치의 평결을 이루어 낸다.  유죄일까 무죄일까?
영화를 못 보신 분들은 직접 확인해 보시기를 바란다.

영화의 카메라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180도의 법칙(180 Degree Rule)"이라는 것이 있다.  

이미지 출처 : http://accad.osu.edu/~midori/Materials/camera.html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을 화면의 좌.우로 배치했을 때,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각 인물을 다른 각도로 잡아서 편집할 때 두 인물을 가로지르는 가상의 선을 넘어가서 그 반대편에서 촬영하면 관객이 공간적인 혼란을 일으킨다.  아주 중요하면서도 기초중의 기초에 속하는 기법인데, 이 영화에서처럼 탁자를 중심으로 12명이나 되는 인물이 둘러 앉아 있으면 인물들이 주고 받는 대화를 어떤 방법으로 촬영하고 편집해야 할까?  이런 경우 180도의 법칙은 지켜질 수가 없다.  하지만 어떻게든 관객에게 혼동을 주면 안된다.  그래서 한정된 공간에서의 영화 구성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여러 면에서 배운 것이 많지만 특히 클로즈업 샷의 힘을 새삼 깨달았다.
12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대사를 주고 받는데 뜻밖에도 단독 클로즈업 샷이 그다지 많이 안 나온다.  대사하는 인물을 잡아내는 가장 쉬운 방법인데 얼마나 쓰고 싶었을까.  하지만 절제해서 사용하는 만큼 그 효과는 아주 대단하다.


현란한 카메라 워크도 없고, 관객을 놀래키려고 숨겨두었다가 터뜨리는 음모도 없다.  그렇다고 무죄를 주장하는 단 한 명의 배심원이 피고인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영화는 우직하리만치 정직하다.  마치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가듯 서두름 없이 탄탄한 구조를 완성해 간다.
영상 언어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배울점이 많은 영화지만, 그 모든 것을 다 잊고 영화의 내용에 푹 빠져서 한 번 즐겨보시기를 추천한다.  특히, 요즘처럼 푹푹 찌는 여름 밤에 감상하면 배심원실의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져서 그 느낌이 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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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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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디는 버즈를 눈에 안띄게 만들 힌트를 얻었다.  이제 어떤 방법으로 버즈를 가구 뒷쪽에 떨어뜨리느냐 하는 구체적인 과정을 만들 차례다.
역시 가장 쉬운 것은, 버즈를 꼬드겨서 잡담을 하면서 그쪽으로 유인해서 밀어 떨어뜨리는 방법이다.  우디의 입장에서는 가장 직접적이고 효과적이다.  하지만 이 경우 몇 가지 문제가 생긴다.  첫째, 직접적인 행동은 우디를 성격 나쁜 캐릭터로 만들 우려가 있다.  둘째, 버즈가 단순한 성격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쉽게 넘어가는 바보 캐릭터는 아니다.  가장 적당한 방법은 사고로 가장하는 것이다.  질투심에 눈이 멀어서 우발적으로 벌이는 사건이기 때문에 미션 임파서블의 수준으로 빈틈없는 방법은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즉흥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상식적인 수준의 이야기를 선택하기로 하자.

① 버즈를 함정 가까이로 끌어들인 다음 ② 다른 물건에 부딛혀서 떨어지게 하는, 그런 방법을 이용하면 좋을 것 같다.  버즈는 정의감에 불타며 생각이 단순하다는 점을 이용해서, 다른 장난감이 곤경에 처했다는 거짓말로 버즈를 함정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이 되겠다.
그렇다면 어떤 물건을 이용해서 버즈를 밀어버릴 것인가?  버즈가 한눈을 팔고 있을 때 다른 물건을 발로 툭 차서 그 굴러가는 힘으로 버즈를 밀어 떨어뜨리면 괜찮을 것 같다.  그런데 뜻밖에도 여기서는 리모컨 자동차를 이용하기로 결정을 했다.  

결정 3) 우디는 거짓말로 버즈를 함정으로 유인한 다음, 리모컨 자동차를 이용해서 버즈를 밀어버리기로 한다.
처음에는 무척 의아하게 생각했던 장면이다.  작전(?)이 성공한다고 해도 결국 자동차가 우디의 범행(?)을 알고있기 때문에 나중에 그 사실을 폭로할텐데 왜?  
하지만 이것 역시 세심하게 계산된 선택이다.  우디의 계획이 결과적으로는 실패를 해서 더 큰 재앙을 초래하고, 앤디가 외출할 때 자신이 선택되는 것으로  이 씬은 마무리되어야 하는데, 사고의 도미노 현상을 우디만 알게 된다면 이 신의 끝부분에서 우디가 당황해하는 모습만으로는 우디가 후회하고 있다는 심경을 표현하기가 부족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건의 전모가 바로 밝혀지고 다른 장난감들의 비난이 쏟아지는 앞에서 우디의 입으로 "이건 사고였어"라는 비겁한(!) 변명을 할 기회를 줌으로서, 우디의 심리 상태를 관객들에서 오해 없이 명확하게 전달해주기 위한 선택이다.  때로는 시각적인 설명으로는 부족한 법이다.

결정 4) 단순히 버즈를 가구 뒷쪽으로 떨어뜨리려고 했는데, 사건이 계획대로 되지 않고 점점 커져서 결국 버즈가 창 밖으로 떨어져버리는 예상치도 못한 재앙이 발생한다.

사고의 도미노 현상을 만드는 과정을 언제나 재미있는 일이다.  우디의 생각과는 다르게 사고가 점점 더 커지는 과정을 영화적인 기교를 이용해서 다이나믹하고 매끄럽게 표현을 했다.  이때 조금이라도 억지스러운 과정을 만든다면 관객의 공감을 얻기 힘들기 때문에 충분히 있을 법한 상황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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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해 보이는 장면 하나에도 이토록 많은 고민과 선택의 과정을 거쳐 결과물이 탄생 한다.  직접 제작에 참여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여기서 다룬 이야기는 수박 겉핥기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또 엉뚱한 분석을 했을 수도 있다.  
무엇이든 아는 만큼만 보이는 법이다.  내 지식의 한계가 이만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많이 부족하지만 그동안 경험을 통해서 얻은 지식을 이 한 장면을 통해서 풀어보려고 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제대로 된 이야기를 만드는 "스토리텔링(Storytelling)", 그리고 그것을 시각적으로 가장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비쥬얼 스토리텔링(Visual Storytelling)".
한 편의 영화가 대중들에게 사랑받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느것 하나 소흘히 할 수 없지만, 기본적으로 영상 언어라는 도구를 잘 알고 사용한다면 좀 더 나은 작품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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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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